시사IN 특별기획
변진경 김동인
사진
이명익 신선영
영상
최한솔 이명익 신선영
아이들 눈에 블랙박스가 있다면
2015년 7월, 대구: 불법 우회전
2021년 3월, 인천: 화물차
2020년 11월, 광주: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2020년 6월, 부산: 비탈길
2020년 5월, 전주: 원칙 어긴 어른들
2020년 1월, 서울: 인도 보행 중
스쿨존만 벗어나면 그만일까?
가난이 미치는 영향
아이들의 보행 안전에 계층 격차가 존재한다
“집 문밖이 바로 차도”
보도도 없고 주차장도 없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놀 곳이 없다
돌봄이 촘촘하다면
보행 안전의 사적 구매
어린이를 혐오하는 어른들
민식이법 놀이는 어른들이 하고 있다
‘민식이법’ 공포는 현실이 되었을까
사람보다 차, 아이보다 어른
진짜 ‘갑툭튀’는 누구일까
문제가 진짜 어린이 쪽에만 있을까?
모든 어른이 그렇지는 않다
아이들 통학로 만들어준 과일 가게 아저씨
슬퍼도 포기하지 않는 엄마들
진심 담긴 네트워크의 힘
스쿨존 너머, 모든길을 안전하게

한 아이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죽었다.

동생 손을 잡고 있었다. 1차로는 무사히 건넜다. 2차로로 들어서는 순간 흰색 소형 화물차가 달려왔다. 차는 횡단보도 앞에서 속도를 낮추지 않았다. 형은 죽었고 찰과상을 입고 살아남은 동생은 말했다. “엄마, 형이 나 밀어서 다쳤어.”

엄마는 통곡하다가 죽은 아들의 이름을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모두가 아는 이름이다. 고 김민식 군(7)이다.

또 다른 한 아이는 놀이공원 주차장에서 죽었다.

엄마 손을 잡고 차 트렁크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SUV 자동차 한 대가 천천히 굴러왔다. 주차장은 2%(약 1.15도) 기울어져있었다. 빈 차의 운전자는 기어를 ‘D’에 놓고 사이드브레이크를 잠그지 않았다.

차와 차 사이에 키 작은 아이의 머리가 끼였다. 아이는 응급실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고 최하준 군(2)이다.

불법 유턴하는 차에 치이고, 인도를 걷다 굴착기에 깔린다. 등굣길 음주운전 차에 목숨을 잃거나, 학교 정문 앞에서 화물차 바퀴에 휘말려 들어간다.

이런 보행 교통사고들로 사망한 만 13세 이하 어린이가 지난 10년간 최소 357명이다. 해마다 학급 하나를 이루고도 남을 수의 어린이들이 길 위에서 자동차에 부닥쳐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기록되지 못하고 대변되지 못한 보행 아동의 ‘생존할’ 권리를 위해, <시사IN> 특별취재팀은 경찰청과 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에 등록된 어린이 보행 사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현장을 취재했다.

지난 석 달 간 전국 17개 도시, 사고 다발 지점 38곳을 찾았다. 현장을 확인하고 증언을 들었다. 원인을 찾고 대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접 걸어보았다. 피해 어린이들이 걸었던 그 길 그 장소들을.

전국 주요 도시 어린이 보행 교통사고 히트맵
서울
수도권
대전
대구
울산
광주
부산
제주
※ 2007~2020년, 만 13세 이하, 사망·중상·경상·부상 신고, 지도에서 색이 진할수록 사고 많은 곳.
데이터: 경찰청·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
데이터 시각화: 브이더블유엘(VWL)

지나간 교통사고의 기록을 세상은 자동차의 시선으로 본다.

유튜브나 포털 어뷰징 뉴스 따위에서 재생되는 자동차 블랙박스 영상 속에서 길 위의 아이들은 이해 불가 존재들이다. 왜 이렇게 느릴까. 왜 이렇게 못 볼까. 왜 이렇게 툭 튀어나올까.

그럴 때 상상해본다.
‘아이들 눈에 블랙박스가 있다면.’

자동차에서 내려와, 길 위에 서서 사람의 눈으로, 키를 낮추어서 아이의 눈으로 본 차도와 보도와 달리는 차들의 움직임은 어떤 모습일까. 기록되지 못하고 대변되지 못한 보행 아동의 ‘생존할’ 권리를 위해, <시사IN>은 뒤늦은 블랙박스로서 거리에 나섰다.

2015년 7월, 대구: 불법 우회전

2015년 7월14일 오전 8시, 대구시 북구 매천동에 위치한 한 6차선 삼거리에서 등교하던 초등학교 2학년 A군이 차에 치여 사망했다.

“높은 SUV 차였는데 애가 작아서 안 보였대. 바퀴 밑에 빨려 들어갔다더라고.”

교차로 인근에 위치한 가구점 사장이 말했다.

근처 보습학원 원장은 2년 전 바로 그 자리에서 강아지가 차에 치여 죽는 사고를 목격했다. “강아지가 주인과 같이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우회전하던 차가 순식간에 탁 치고 지나가더라고요. 거기가 살짝 오르막에서 바로 우회전해서 만나는 횡단보도인데 차들이 거의 안 서요. 강아지든 아이들이든 작아서 운전자 시야에서 잘 안 보이잖아요. 이런 데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안전장치를 하고 우회전하는 운전자에게 경고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사IN> 분석 결과, 전국 각지에 이렇게 사고가 반복되는 지역이 많았다.

①정읍시 장명동 ②대구시 매천동 ③인천시 신흥동 ④제주시 노형동 ⑤인천시 도화동

모두 차량들이 불법 우회전을 하다 사고를 낸 곳이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지난 5월11~12일 서울 시내 교차로 6곳에서 우회전하는 차량 823대를 조사했다.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있을 때 완전히 멈춘 차는 159대뿐이었다. 나머지 차량은 횡단보도 위를 침범해 차를 세우거나, 슬금슬금 보행자 곁을 다가오거나,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나아갔다.

보행자 신호에 차량들이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가고 있다
2021년 3월, 인천: 화물차

2021년 3월18일 오후, 인천 중구 신흥동 한 학교 정문 앞 횡단보도에서 하교하던 초등학생이 화물차에 치여 사망했다. 직진차로에서 불법 우회전하던 25톤 화물차가 아이를 치고도 곧바로 멈추지 못하고 20미터 가까이 끌고 나아갔다.

인천항으로 이어지는 이 6차선 도로에는 하루 종일 대형 화물차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인천 신흥동 사망 사고 이후 해법을 찾던 경찰은 화물차량 통행 제한을 실시하기로 했다. 9월1일부터 평일 하교 시간인 오후 1~4시 사이에는 4.5톤이상 화물차, 대형 특수차, 건설기계 등은 학교 전후 1.1km 구간 대신 다른 우회로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화물차가 학교 앞을 못 지나게 하는 건 근본적 처방이 아니다. 김근영 민주노총 화물연대 인천본부장은 이렇게 말한다.

“화물차량 통행이 아이들의 동선과 겹치지 않고 사고를 방지할 수 있게끔 하는 장치가 사회적으로 부족하다. 물류 사업장을 만들 때 화물차 주차장을 따로 두지 않아도 허가를 내준다. 화물차들은 물건을 받고 내리기 위해 대기할 장소가 없어 주변 도로를 뱅뱅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그럴 때 근처 학교가 있거나 하면 위험도가 높아진다.”

인천 신흥동 화물차 통행 제한은 지난 6월부터 한달 가량 시범 운영을 거쳤다. 시범 운영이 끝나던 날, 또다시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7월10일 덤프트럭 운전자가 자전거를 타고 가던 60대 피해자를 쳤다. 11세 아동이 사망한 곳에서 불과 15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사고 현장에 나와 조사하던 경찰 관계자는 “워낙 화물차 통행량도 많고 교차로 모양도 복잡해 사고를 막기가 쉽지 않은 지역이다”라고 말했다. 그 위태로운 찻길 바로 앞에 전교생 736명 규모의 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2020년 11월, 광주: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건너편에 유치원 버스가 서있었다. 엄마는 첫째 아이를 등원시키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한 손은 둘째와 막내가 탄 대형 유모차를, 다른 한 손은 첫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엄마와 아이들은 횡단보도 중앙선 부근에서 한참을 멈춰서 있었다. 반대편 차선에서 오는 차량들 중 아무도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거나 속도를 줄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 사람이 서 있는 줄 몰랐다는 화물차 기사가 엑셀레이터를 밟아버렸다. 1세 막내는 다행히 경상에 그쳤다. 엄마와 7세 첫째는 중상을 입었다. 3세 둘째 아이는 사망했다.

ⓒ연합뉴스
운전자와 보행자는 횡단보도를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

2016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아동복지연구소는 ‘아동의 생활환경 안전연구’에서 초등학생 아동의 등하굣길 관찰연구를 수행했다. 이 조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 주위를 살피는 아동은 4%에 그쳤다. 많은 어린이들은 신호등이 있든 없든 횡단보도를 안전한 공간으로 인식했다.

반면 운전자의 생각은 다르다. 한국안전교통공단 관찰 조사에 따르면,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185회 건너는 동안 운전자가 일시 정지 규정을 지킨 경우는 단 8회에 불과했다. 어린이보호구역인 초등학교 앞 무신호 횡단보도에서도 36대 중 2대만 보행자를 위해 차를 멈추어주었다.

2020년 6월, 부산: 비탈길
ⓒ연합뉴스

부산에 위치한 한 초등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 붉은색 벽돌로 쌓은 담벼락 중 일부에 회칠이 덜 말라있다. 지난해 6월15일 사망 사고 이후 새로 쌓아올린 담벼락이다.

자동차 한 대가 이곳을 무너뜨렸다. 건너편 내리막길에서 돌진해온 차량이었다. 차는 스쿨존 방호 울타리를 뚫고 담 너머 떨어졌다. 운전자는 부상에 그쳤지만 6세 어린이(여) 한 명이 사망했다.

어쩌다 사고가 일어났을까?

건너편에 민영 주차장이 있다. 그곳에서 나온 A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어 불법 좌회전하다 신호 대기 중이던 B승용차를 들이박았다. B승용차는 중심을 잃었다. 놀란 운전자는 브레이크 대신 엑셀을 밟아버렸다. 길은 내리막길이어서 더 가속이 붙었다.

부산시 재송동

이 근처는 원래 사고 다발지였다. 사망사고 지점 인근에서 지난 10년 간 15건(사망 2명, 중상 4명)이 발생했다. 사고가 일어난 이곳 부산시 재송동은 경사가 심한 지역이다.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에서 자동차가 걷는 어린이를 만나면 사고 확률과 강도가 높아진다.

작은 경사라도 운전자의 실수와 만나면 아주 쉽게 비극이 일어난다. 고 최하준 군(2)이 당한 사고가 그런 경우다. 2017년 10월1일 경기 과천시 놀이공원 주차장에서 참변을 당한 하준 군은 운전자 없이 중력에 따라 굴러 내려오는 SUV 자동차에 깔렸다.

놀이공원 주차장 바닥의 경사도는 1.15도, 하준 군에게로 굴러온 차량 속도는 불과 시속 4km였다. 그래도 아이는 목숨을 잃었다. 차는 너무 크고 무겁고, 아이는 작고 약하기 때문이다.

2020년 5월, 전주: 원칙 어긴 어른들

전북 전주시 반월동 왕복 4차선 도로, 좌회전 차선에 ‘유턴 금지’ 화살표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중앙선엔 철제 분리대가 설치돼있다. 횡단보도 중간에까지 유턴 방지용 봉이 박혀있다. 차량과 보행자용 신호등에 모두 노란색 덧칠이 입혀있고 빨갛게 포장된 차도 위에 ‘어린이보호구역’ 글자가 큼직하게 쓰여있다.

모두 2세 유아가 사망한 후 생긴 안전장치들이다. 지난해 5월21일 버스정류장 옆에 서 있던 아이 앞으로 SUV 승용차 한 대가 돌진해왔다. 반대편 차선에서 불법유턴한 자동차였다.

“어린이보호구역인지 몰랐다”

가해 운전자 측은 법정에서 “(눈에 띄는 장치가 없어) 어린이 보호구역인지 몰랐다”라며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상 어린이보호구역 치사, 이른바 ‘민식이법’ 적용에 반박했다. 150미터 인근에 초등학교가 있고 원래 어린이보호구역으로 지정돼있는 곳이었지만 학교가 골목길 안에 있어 큰길에서 보이지 않았고 관련 표식도 없어,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구역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표식이 잘 보였든 아니든, 어린이보호구역이든 아니든, 그곳은 원래부터 유턴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노란색 중앙분리선이 두 줄이나 선명하게 그어진 일반 차선에서 가해 운전자는 분명 자동차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

사고 이전 이 부근에서 수시로 일어나던 관행이었다. 인근에서 문구점을 운영하는 최용호씨는 “이 근처에서 불법유턴과 신호위반이 워낙 빈번했다. 가게에 있다 보면 빵빵 소리도 자주 들리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자주 일어났다”라고 말했다.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사망 지점 인근 100m 내에서 10여 건의 어린이 보행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전주시 반월동

어른들이 어기는 원칙은 또 있다. 음주운전이다. 2020년 6월11일 오전 8시40분, 충남 서산시 읍내동 한 초등학교 근처에서 7살 남자 아이가 사고를 당했다. 아이는 횡단보도 교통섬(우회전 차량의 원활한 통행을 위해 보행자가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릴 수 있도록 차도상에 섬처럼 설치해놓은 구역)으로 이어지는 짧은 무신호 횡단보도를 건너가던 중 사고를 당했다.

가해 운전자는 당시 혈중알콜농도 0.031%, 면허 정지 수준이었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전날 밤 마신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사람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횡단보도 인근에서 ‘툭’ 소리가 들려 내려보니 아이가 쓰러져있었다”라고 진술했다.

지난해 9월 서울 홍은동에 위치한 한 패스트푸드점 앞에서도 비슷한 사고가 발생했다. 인도에 서 있던 아이에게 갑자기 커다란 물체가 덮쳤다. 술을 마신 뒤 핸들을 잡은 운전자가 아이 근처에 있던 가로등을 들이받은 것이다.

운전자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취소 수준인 0.144%. 운전자는 과거 음주운전 벌금형 처벌 전력도 있었다. 피해 아동은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 엄마가 햄버거를 포장해올 동안 가게 문 앞에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원칙을 어긴 어른들의 ‘이쯤이야’에 원칙을 지킨 아이들의 생명이 끊겼다.

2020년 1월, 서울: 인도 보행 중

심지어 인도를 걷는 중에도, 자동차는 아이들을 덮친다. 지난해 1월14일 서울 신월동에서 10세 여자 아이가 굴착기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집 앞이었고 매일 걸어 다니던 길이었다. 편도 4차로 중 제3차로를 따라 진행하던 굴착기는 주유소 입구 앞에서 진로를 급격히 변경해 우회전했다. 당시 사고를 목격했던 신경수씨는 “굴착기가 ‘칼치기’로 속도도 줄이지 않고 진입해 아이를 밟고 지나가는 모습을 봤다”라고 말했다.

사고 후 굴착기 운전자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치사)으로 금고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업무상 주의의무를 위반한 죄였다. 하지만 보도 위로 굴착기가 진입한 행위 자체를 위법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곳이 ‘도로점용허가’를 받은 구역이기 때문이다.

주유소·주차장·자동차수리소·세차장에 차량이 드나들기 위한 진입로 및 출입로도 도로점용허가를 받을 수 있다. 건설사업정보시스템 통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매해 전국 2000여 곳씩 도로점용허가가 승인됐다. 한번 허가받으면 10년간 점용을 유지할 수 있다

신월동 사망 사고 지점 앞뒤 200미터씩을 걷다보면 도로점용허가 구역을 10곳 가까이 만난다. 오토바이, 승용차, 화물차, 지게차 등이 보행자 앞뒤를 가로질러 주유소, 카센터, 드라이브 스루 카페·패스트푸드점, 주차장 등을 합법적으로 오간다.

도로점용허가구역은 어디에나 있다

전북 전주시 인후동 한 초등학교 정문 바로 앞, 충남 서산시 읍내동 한 어린이보호구역도 주차장·카센터·슈퍼마켓 진입로가 보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곳들 모두 보행 어린이 중상 사고 다발 지역이다.

①서울시 신월동 ②전주시 인후동 ③서산시 읍내동
스쿨존만 벗어나면 그만일까?

우리나라에서 도로 위 어린이 보호에 관한 논의는 최근 몇 년 사이 예전과 비교해 많이 발전해왔다. 하지만 아직 분명한 선이 있다. 바로 어린이보호구역, 스쿨존이다.

사고다발지에 가면 자주 눈에 띄는 장치가 있다. 어린이보호구역 끝 지점임을 알리는 표지판이다. 그 지점에서부터 인근 학원가, 상점 번화가, 놀이터, 공원에 이르는 길에 보행 어린이 교통사고가 빈발했다.

①목포시 용해동 ②김해시 외동 ③화순군 화순읍
색칠된 부분이 어린이보호구역

현행 어린이보호구역 지정 범위는 초등학교 등 주출입문에서 300미터 내로 설정되어있다. 하지만 교통사고는 학교에서 40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다.

걷던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른들은 가장 먼저 이것을 묻는다. ‘그곳은 스쿨존인가 아닌가’. 처벌에 적용받는 법률 조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스쿨존이면 기존보다 형량이 더 높은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을, 스쿨존이 아니면 형량이 비교적 낮은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을 적용받는다.

사실 스쿨존 여부는 처벌의 경중을 가늠하는 운전자와 성인의 관점에서 중요한 기준이다. 어린이의 안전과 위험은 스쿨존이라는 한정된 존(ZONE)에 머무르지 않는다.아이들 입장에선 차에 받히면 목숨이 위태롭고 몸과 마음이 손상되기는 스쿨존 안이든 밖이든 모든 길에서 매한가지다. 어린이는 모든 길에서 목숨과 안전을 위협받고 있었다.

세영이(9, 가명)가 걷는 길

학교까지250m(도보 5분 거리)

영어 학원까지100m(3분 거리)

구립도서관까지150m(3~4분 거리)

인근 어린이 놀이터12개

하루 일상 중 자동차 대면 횟수0회

거주 주택 가격매매가 20억원(전세가 12억원)

민지(10, 가명)가 걷는 길

학교까지 1.2km(도보 20분 거리), 이사 후 200m(5분)

돌봄센터, 태권도학원까지 1km(15~20분)

반경 500m 내 도서관, 공원0개

인근 어린이 놀이터1개

하루 일상 중 자동차 대면 횟수100회 이상

거주 주택 가격전세 1억6000만원

아이들의 보행 안전에 계층 격차가 존재한다

<시사IN>과 데이터 분석 및 시각화 전문업체 브이더블유엘(vwl)은 이를 통계로 확인해보았다.

*아동 1만명당 연간 평균 사고 발생 건수: 2011~2020년 각각 12월 기준의 13세 이하 아동 인구 수와 매해 각각의 사고 건수를 통해 해당 연도의 ‘1만명당 사고 발생 건수’를 구한 뒤 10년 치 평균값을 냈다.
*주거 전월세가: 연도별·지역별 전월세 전환율을 이용하여 각각의 실거래가를 모두 전세가로 맞추었다.
*자료: 통계청 행정구역별 주민등록인구, 경찰청·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
*데이터 분석 및 시각화: 브이더블유엘(VWL)

높은 곳에 위치할수록 아동 인구 수 대비 사고율이 높은 지역이다. 그래프에서 점이 오른쪽으로 찍힐수록 주거가격이 높은, 부유한 지역이다.

일부 광역지자체 단위에서 주거가격과 아동 교통사고 위험 사이 경향성이 관찰되었다. 부유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주거 수요가 높은 지역들과, 빈곤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주거 수요가 낮은 지역들의 덩어리가 꽤나 구분돼 그래프 위에 위치했다.

경기도의 경우 과천시·성남시 분당구·용인시 수지구 등이 오른쪽 하단에, 성남시 수정구·안산시 상록구·수원시 팔달구 등이 왼쪽 상단에 위치해 있다.

서울은 강남구·서초구·송파구 등이 오른쪽 아래, 중랑구·금천구·강북구 등이 왼쪽 위에 분포돼있다. 세영이가 사는 지역도 오른쪽 하단, 민지가 사는 지역도 왼쪽 상단에 위치해 있다.

왜 격차가 발생할까?

단순히 주거가격의 차이가 아니다. 주거가격의 차이를 만들어낸 환경과 요인들이 있다. 사고율이 낮은 지역에 집중된 ‘안전’ 요소와 사고율이 높은 지역에는 상존해있는 ‘위험’ 요소를 밝히는 일이 아이들의 계층별 안전 격차를 줄이는 작업의 출발점이다.

“집 문밖이 바로 차도”

경기 시흥의 한 밀집 주택가에서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는 정경 소장은 아이들이 센터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갈 때마다 노심초사 마음을 졸인다.

“문밖이 바로 차도다. 아이들 특성상 앞을 안 보고 튀어 나가면 차와 부딪칠 수밖에 없다. 위험한 순간이 많았고 실제 사고를 당해 입원한 친구도 있었다.”

그 지역 한 어린이는 차를 피하다가 넘어져 왼쪽 손을 다쳤다. 뼈를 이식하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괴사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보도도 없고 주차장도 없다

이런 지역 대부분 길에 보도가 따로 없다. 자동차와 사람과 상가의 적치물 따위가 뒤섞인 이면도로에서 보행자는 앞뒤 차량의 움직임과 속도를 부단히 간파하고 예측하며 걸어야 사고를 피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주차장도 없다. 집과 가게 앞에 주차해놓은 차들은 가뜩이나 잘 보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위험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놀 곳이 없다

2019년 청년허브 공모연구 ‘서울의 공간불평등 검토’에 따르면 어린이 놀 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대표적인 하나가 주거 형태였다. 아파트 비율이 높은 곳일수록 (1인당) 어린이 놀 공간, (1인당)어린이 공원 면적, (1인당)어린이 놀이터 면적과 정적 상관관계를 보였다. 다가구와 연립 및 다세대 비율이 높은 곳일수록 대체로 부적 상관관계를 보였다.

취재 기간 목격한, 사고다발지 주변 아이들이 주로 모여 노는 장소는 그래서 학교 앞 문방구 인근 도로, 교차로 편의점 인근 도로, 잠깐 비어있는 주차장 공간 따위였다. ‘왜 여기에서 노는지’ 물으면 똑같은 대답이 나왔다. “다른 놀 데가 없어서요.”

돌봄이 촘촘하다면

성인 보호자가 어린이의 모든 외출에 손잡고 동행하면 위험한 곳에서도 어느 정도는 위험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격차가 존재한다. 길에 보행 위험 요소가 많은 구도심 빈곤 지역의 아이들은 많은 경우 안전에 관한 적절한 돌봄에서도 배제되어 있다.

경기도 한 초등학교 교사는 말했다. “(학부모가 교통지도 봉사를 맡는) 녹색 어머니 신청만 받아봐도 격차를 느낄 수 있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 학교일수록 학부모 참여가 저조하다. 위험한 길을 저학년 때부터 혼자 통학하는 아이들 비율도 높다.”

정경 소장은 말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울수록, 소득이 낮은 가정일수록 제일 둔감하고 뒤로 처지는 게 안전 문제다. 먹고 사는 게 급하기 때문이다. 아이들 보행 안전이 위협받아도 그것에 문제가 있다고 부르짖을 보호자가 없고, 아이들 스스로도 그 권리를 인식하도록 교육받을 기회가 없다.”

보행 안전의 사적 구매

지금 우리나라에서 어린이의 보행 안전에는 사적 비용이 든다.

아이의 모든 외출에 보호자가 동행하려면 성인 누군가 한 명은 생계 전선에서 벗어나 하루 종일 아이를 전담해야 한다. 많은 맞벌이 부부가 자녀의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 육아휴직을 사용한다. 이것이 안 되면 조부모 찬스를 쓰거나 돌봄 시터를 고용한다. 이마저 불가하면 셔틀 버스로 학교 앞에서 바로 아이를 태워가는 학원에 등록한다. 아니면 아예, 주거지를 옮긴다. 신축 ‘초품아’ 단지를 수색해 높은 비용을 치러 이사를 간다.

여유가 없는 집 아이들은 누릴 수 없는 안전 요인과 환경들이다.

지자체에서 교통대책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 김아무개씨는 말했다.

“구도심에서 아이를 키우던 가정 중 형편이 그나마 좋은 집은 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인근 신도시로 이주한다. 구도심에는 점점 아이들이 줄어들고 남아있어도 생계에 허덕이거나 다문화 가정 등 취약한 가정이 대부분이다. 안전에 대한 요구나 민원도 잘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지자체 입장에서도 한정된 어린이보호 예산 안에서 민원이 많고 주민 목소리가 큰 신도시 위주로 우선순위를 배정하게 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결과적으로 구도심은 중산층이 많이 거주하는 신도심에 비해 (아동 안전에 관한) 정책적 지원이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난다.”

지난해 5월 스마트폰 앱마켓에 모바일 게임 하나가 출시됐다. 제목은 ‘스쿨존을 뚫어라-민식이법은 무서워’. 어린이보호구역을 운전하며 어린이들을 피하는 게임이다.

게임 속에서 아이들은 ‘킬킬’ 소리를 내며 운전자를 위협하는 고난도 장애물이다. 친구와 걷는 아이, 자전거를 탄 아이, 동전을 줍는 아이, 공을 들고 뛰는 아이들이 점점 더 많이 빠른 속도로 차를 향해 돌진해온다. 손가락으로 자동차 좌우 방향을 조작하다가 차로 아이를 치면 게임이 종료된다. 운전자가 경찰에 잡혀가고 자동차가 찌그러진다.

이 게임의 평점은 5점 만점에 4.8점. 2500여개에 달하는 사용자 리뷰도 호평 일색이다.

“실제 상황과 매우 유사한 게임” “본인의 과실이 없어도 과실로 만들어 즉각 실형을 때리는 현실까지 반영돼 있다” “운전자들의 심정을 알게 되었다” “애들이 일부러 와서 박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현실 반영 쩐다”…

“민식이법 짜증났는데 게임으로나마 마음껏 으깨니 기분이 딱 좋네요.” “죽이면 피 터지고 사지 찢기게 19금으로 수정해주세요” “애들 일부러 치어 죽이면서 스트레스 푸는 중” “내장 터지는 것도 표현해 주세요”…

민식이법 놀이는 어른들이 하고 있다

어린이보호구역과 민식이법을 둘러싸고 대한민국에는 어린이를 향한 혐오의 지옥도가 펼쳐져있다.

유튜브 영상, 온라인 커뮤니티, 그곳에 달린 댓글들 속에서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당할 뻔한 길 위의 어린이는 ‘초라니’ ‘시한폭탄’ ‘자폭맨’ ‘도로 위 흉기’로 불린다.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모는 ‘보험금을 노리는 사기단’으로 조롱받는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고 예방책과 처벌을 강화하자는 호소는 ‘떼법’ ‘감성팔이’ 따위로 폄훼된다.

보험 시장과 법조 시장은 민식이법 공포를 팔아 고객을 유치하고 포털 뉴스 시장은 자극적인 어뷰징 기사로 클릭 수 경쟁을 벌인다. 이곳에서 어린이는 더 이상 나라의 보배, 미래의 희망이 아니다. 내 차의 속도를 방해하고 나를 감방으로 넣어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가해자다.

자신을 길 위의 피해자로 인식하는 성인 운전자들의 논리는 단순하다.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아무리 조심해도 고의성을 지녔거나 돌출적으로 튀어나오는 아이가 차에 부딪치는 순간 “인생이 망한다”.

근거는? 유튜브, 온라인 커뮤니티, 어뷰징 기사 등에 떠돌아다니는 자동차 블랙박스 영상과 캡처 사진들이다. 아이들이 민식이법을 악용해 용돈벌이를 하는 중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학교 앞에서 차 만지면 진짜 돈 주나요?’라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는 네이버 지식인 질문들 몇 개 정도다.

영상, 댓글, 네이버 지식인 따위의 짜깁기로 ‘민식이법 놀이’는 언론사들의 주요 뉴스가 되고 커다란 사회 문제로 등극했다. 아무리 선량한 운전자라도 “(피해자 사망 시)무조건 징역 3년!” “(상해 시)무조건 벌금 500만 원!” “강간범에 맞먹는 형량!”을 피할 수 없다는 일부 유튜버들의 주장이 그대로 기사 제목이 되고 대중들의 상식이 되었다.

급기야 학교들은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민식이법 놀이 금지’ 가정통신문을 보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페이스북에 ‘민식이법 놀이’에 관한 기사를 공유하며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취지로 글을 올렸다.

‘민식이법’ 공포는 현실이 되었을까

정말 스쿨존은 운전자가 아이에게 ‘치여서’ 인생을 망칠 수 있는 구역일까. 민식이법은 한 치 죄가 없는 선량한 일반 운전자도 최소 3년 콩밥을 먹게 만드는 최고의 악법일까.

민식이법이 있어도, 운전자가 교통법규를 위반해도, 아이가 다치거나 죽어도 운전자들은 여러 면책 조항을 통해 가중처벌을 충분히 피해갈 수 있었다.

사고를 피하기 어렵기 때문에 ‘무죄’

지난해 12월26일 대전 유성구 한 학교 인근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술래잡기하던 7세 어린이를 자동차로 치어 전치 10주의 중상을 입힌 B씨(61)도 지난 6월23일 무죄를 선고받았다. 1심을 맡은 대전지법 형사12부 재판부 역시 블랙박스 영상에 아이가 나타난 시점과 충돌 시점 간격이 0.5~0.6초로 짧은 점을 근거로 들었다.

신호 위반했지만 치료비를 지급해서 ‘집행유예’

오토바이 운전자 C씨(48)는 지난해 12월9일 인천시 미추홀구 한 스쿨존에서 9세 어린이를 치어 머리를 다치게 했다. 피해자는 보행자 초록불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이었다. 재판부는 스쿨존 내에서 신호를 위반하다 사고를 낸 피고인의 죄가 가볍지 않다면서도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하고 피해자와 합의는 못했지만 보험을 통해 치료비가 지급된 점 등을 고려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범행을 반성해서 ‘감형’

지난해 8월19일 인천시 계양구 한 스쿨존의 무신호등 횡단보도에서 10세 어린이와 그의 어머니를 치어 다치게 한 운전자 D씨(34)도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한 점, 차량이 자동차 종합보험에 가입돼 그에 따른 처리가 이뤄진 점” 등이 감형의 근거가 됐다.

스쿨존인지 몰랐으니 ‘불기소’

지난해 8월 경기도 광주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에서는 SUV 운전자 E씨(25)가 자전거를 타고 가던 6살 어린이를 들이받아 전치 2주의 상해를 입혔다. 하지만 경찰은 사건을 불기소 처분했다. “해당 장소의 어린이보호구역 안내 표지가 부실해서 운전자가 스쿨존인지 알 수 없었다”는 이유였다.

과속에 신호 무시했지만 전과가 없어서 ‘벌금형’

지난 3월26일에는 운전자 F씨(30)가 서울 양천구 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제한 속도를 넘은 시속 35km로 신호까지 무시하며 달리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던 7세 어린이 두 명을 치어 상해를 입혔다. 하지만 벌금 500만원 형을 받는 데 그쳤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형사 처벌 전력이 없는 점” 등을 고려했다.

사람보다 차, 아이보다 어른

우리나라는 아직 길 위에서 사람의 안전보다 자동차의 흐름이 더 중요한 세계다.

경기도 한 초등학교 등굣길에서 교통 지도 업무를 맡은 실버 일자리 참여 어르신은 차도와 보도가 구분되지 않은 이면도로에서 노란 깃발을 들고 아이들에게 “차 가게 빨리 비켜줘라”며 호통을 쳤다.

“애들 때문에 차들이 가지를 못해. 교통 흐름을 막 방해한다고.”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이제껏 차도 주변 환경을 고려하며 속도를 감각하고 통제해본 경험이 없다. 임재경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은 말했다.

“도시 간 고속도로든 도시 내 시내도로든 편도 2차로가 넘고 앞이 뚫려있으면 당연히 시속 70km 이상으로 달려도 되는 줄 알고 운전해왔다. 유럽 등 교통 문화 선진국에서는 차도가 위치한 주변의 환경에 따라 운전자의 속도와 태도가 달라진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은 당연히 차보다 보행자가 우선이고, 차가 사람이 보이면 서지 사람이 차의 눈치를 보며 멈칫하지 않는다.”

임 연구위원은 덧붙였다. “민식이법 이후 운전자들이 스쿨존에서 가지게 된 긴장감과 경각심이 어쩌면 차도 옆 주변 환경을 인식하며 자신의 속도를 감각하는, 보행자 중심 교통 문화의 최초 경험일 수도 있겠네요.”

진짜 '갑툭튀'는 누구일까
서울디지털재단 제공

서울디지털재단은 지난해 11월 ‘어린이 눈높이에서 바라본 통학로 교통안전’을 통해 보행 시 어린이들의 시야를 영상에 담았다.

서울 은평구 내 초등학교 3학년 이하 어린이 24명에게 구글 글래스(안경형 영상촬영장비)와 액션캠을 착용시켜 등하굣길을 걷게 했다. 키 120~130cm의 아이들 시점에서 촬영된 영상 데이터를 분석했다.

영상에는 방해물들이 총 1387번 등장했다. 어린이 한 명당 통학로에서 평균 15.4초마다 방해물을 접했다. 시야를 50% 이상 가리는 장애물이 총 175번 나타났다. 90% 이상의 시야를 방해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방해물 중 가장 큰 비중은 주정차차량(45.8%)였다.

서울디지털재단 제공

차량 운전석에 앉은 어른의 눈에 아이는 지나치게 굼뜨거나 지나치게 갑작스럽다. 앞도 잘 살피지 못하고 소리도 잘 못 듣는다. 일부 성인들은 이런 아이들을 ‘초라니(초등학생과 고라니를 합쳐 부르는 말)’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옴)’ 따위로 부르며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런데 이는 운전자나 성인 입장이다. 걷는 어린이 입장에서 지나치게 빠르고 예측불허인 건 도로 위 차들이다. 이것저것 방해물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달려와 생명과 안전을 위협한다.

어린이 입장에서 ‘갑툭튀’는 자동차다

어린이는 성인에 비해 키가 낮고 몸집이 작다. 시각, 청각, 지각력, 순발력, 상황 판단 능력 등도 상대적으로 약하다. 반면 관심 대상에 대한 집중력, 호기심, 탐구력, 모든 물체를 놀이의 수단으로 전환하는 능력 등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이 약점과 능력 때문에 어린이는 길 위에서 불리하다. 도로 환경은 성인과 자동차를 기준으로 설계돼 있다. 거기에 맞춰 어린이는 그들의 약점과 능력을 개선하거나 억누를 것을 강요받아왔다. 그게 지금까지의 어린이 교통 안전 대책이었다.

문제가 진짜 어린이 쪽에만 있을까?

2013년 6월 대한교통학회지 제31권 제3호는 ‘비신호 횡단보도에서의 어린이 횡단행태 분석 연구’(이덕환 외)를 소개했다. 연구자들은 경기도 소재 7개 초등학교 인근 비신호등 횡단보도를 횡단하는 어린이들의 행태 1471건을 관찰·분석했다.

연구자들은 관찰 지점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사고가 자주 일어난 사고 다발 횡단보도와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무사고 횡단보도이다. 무엇이 달랐을까?

횡단보도의 위치·모양·면적에 따라 어린이의 횡단 전 주의 여부, 대기 지점, 안전횡단 방해 행동에 차이가 났다.

학교 출입구에서 횡단보도까지 직선거리가 멀어질수록 안전한 보행 행동이 늘어났다. 학교 정문을 나서자마자 횡단보도가 보이면 ‘일단 직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횡단보도 근처 보도의 폭이 넓을수록 아이들이 일단 대기해 차량이 멈추길 잘 기다렸다. 반대로 횡단해야 하는 차도의 폭이 넓을수록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횡단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보도가 넓고 차도가 좁은 보행자 친화형 도로 환경이 어린이들의 안전 행동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어린이 보행 교통사고가 일어난 장소에서 많은 어른들을 만났다. 그들은 주로 화가 나 있었다. 사고 이후 자기 집과 가게 앞에 생긴 횡단보도와 어린이보호구역 표지판과 인도 펜스 등이 불편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 소수였지만, 어린이에게 미안해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아이들 안전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원을 내놓는 어른도 만났다. 성난 어른들의 목소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길 위에 선 아이들에게 내미는 따스한 손들이 전국 구석구석 숨어있었다.

아이들 통학로 만들어준 과일 가게 아저씨

지난 7월8일 아침 등굣길, 전북 전주시 덕진구 한 동네에서 책가방을 멘 아이들 일부가 묘한 곳으로 총총 모여들었다. 한 단층 상가 건물의 중앙이었다. 과일 가게와 생선 가게 사이 조그맣게 뚫린 통로에 ‘OO초등학교 가는 길’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이들은 그 길을 지나면서 사고다발 지점 여러 곳을 피해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나 지자체에서 마련한 길일까. 보행로를 만든 사람은 ‘과일 가게 아저씨’ 박주현씨였다.

박씨는 이 건물을 지을 때 동네 아이들 보행로를 설계에 집어넣었다.

“원래 주차장 자리였는데, 학교 가는 지름길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이쪽으로 엄청 많이 다니더라고요. 상가를 지어 막아버리면 돌아서 가느라 더 위험해질 것 같았어요. 고민하다가 건물을 분할하고 중앙에 애들 길을 만들어주기로 했어요.”

계산기를 두드려보지 않은 건 아니다. 스무 평 남짓 상가 공간의 기회비용이 적지 않았다. 임대를 놓아도 월 100만원 1년 1200만원 이상이다.

잠깐 고민하다가, 박씨는 동네 아이들이 안전해지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아이들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아이들 사고 하나라도 덜 나고 조금이라도 덜 다치면 좋죠.”

슬퍼도 포기하지 않는 엄마들

경기 부천시 도당동은 수도권 도심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세대 주택가다. 차도와 보도의 분리 없는 좁은 골목길을 자동차와 보행자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통행해야 한다.

주택가 가운데 위치한 초등학교를 아이들이 오갈 때도 마찬가지다. 학교 바로 앞 직선거리 160여 미터를 제외하곤 어린이보호구역은커녕 인도도 없다. 아이들은 늘 주정차된 차를 피해 지그재그로 도로 위를 걷는다.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학부모와 주민들은 지난 4월부터 짬짬이 시간을 내왔다. 현장과 지도를 뒤지며 문제점들을 조사하고 타 지역 사례 등을 참고해 대안들을 모색했다. 어디에 어떤 안전 장치를 설치하면 좋을지, 어디를 일방통행로로 지정하면 보행자와 차량 운전자 모두 쾌적하게 다닐 수 있을지 등을 궁리해 안(案)을 만들었다.

단 하나도 쉽지 않았다. 관련 규정, 주변 상인들의 반대, 주차 공간 부족, 역민원 발생 가능성, 소관 부처가 아니라서 등등 안 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더 놀랍고 슬펐던 건, 이 모든 활동들이 예전에도 같은 지역에서 똑같이 시도되었다는 사실이었다. 3년 전과 10년 전에도 주민들이 통학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백방으로 뛴 적이 있다.

지금과 똑같이 문제점들을 조사하고 주민들 서명을 받고 관련 기관들을 찾아갔다. 주차공간이 부족해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련 기관들을 설득해 마을에 공용 주차 공간 마련을 이끌어냈다. 대신 아이들 학교 가는 이면도로에 보행로 선이 하나 그어졌다. 그게 전부였다.

데자뷔 같은 이번 통학로 개선 활동도 아직까지 큰 성과를 이뤄내지 못했다. 인근 구간을 아예 어린이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시청 쪽에서 먼저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인근 상인들 반발로 8월 말 현재 논의가 멈춰있는 상태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해보기로 마음을 모은 학부모 여섯 명은 아직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다. “다른 데 보면 그렇더라고요. 사고가 나서 아이가 하나 죽어야 바뀌어요. 그러기 전에 어른들이 먼저 안전한 환경으로 바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심 담긴 네트워크의 힘

지난봄, 경남 창원시 6개 초등학교 인근에 노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 무리가 여기저기 출몰했다. 통학로 개선 프로젝트 ‘그린로드’ 참여자들이다.

이들은 학교 인근 도로 위 길이와 폭을 재고 사진을 찍었다. 지도를 살피고 통학로를 직접 걸어보며 조사서에 부지런히 기록을 남겼다. 기록들은 취합돼 학교, 교육청, 구청, 행정복지센터, 경찰서 등에 전달되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경남아동옹호센터가 아동 권리 옹호 사업으로 처음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된 ‘그린로드 대장정’은 창원에서만 올해 3년째다.

지난해 그린로드에 참여한 기관은 초록우산과 창원시 초등학교 6곳을 포함해 모두 21곳이다. 시청, 시의회, 도의회, 교육청, 경찰서, 지역 언론사, 지역 대학, 녹색어머니회, 시민단체 등 어린이 통학로 개선에 관심 있고 실행력 있는 주체들이 다양하게 손을 보탰다.

네트워크가 가동되면서 ‘소관 부처가 아니라서’ ‘실행 권한이 없어서’ ‘의견 수렴이 어려워서’와 같은 핑계들이 어린이 통학 환경 개선 실행의 발목을 잡는 일들이 줄어들었다.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자녀의 교통사고 기억을 아프게 갖고 있는 학부모 신유진씨(마산중부 녹색어머니회 회장)는 그린로드 활동에 참여하는 일 자체로 위로를 받고 희망을 느꼈다.

“알고 보니 우리 아이가 사고를 당한 길이 워낙 위험해서 예전에도 개선을 위한 주민 서명을 받은 일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도 바뀌지 않았고요. 우리 아이가 사고가 났고 지금도 여기가 너무 위험한데 이대로 둬도 되는 건지, 정말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갈망이 내내 있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는 느낌이었어요.”

김상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경남아동옹호센터 과장은 말했다. “통학로 개선 활동을 시작해보면 확실히 느끼는 것은, 이 일은 절대 혼자 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한 기관, 한 단체의 힘으로는 도로 표지판 하나 바꿔내기가 어렵다. 여러 주체들이 네트워크를 이뤄 협력하고 연대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민간이 다 합심해도 행정 기관이 꿈쩍 않으면 소용이 없다. 대부분 지역에선 이 단계에서 막혔다. 그래도 예외는 있다. 진심이 통하는 정치인과 공무원을 만났을 때다. 그린로드 활동가들이 이옥선 경남도의회 의원과 정계영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제교통과 계장 등을 만났을 때가 그랬다.

정계영 계장은 말했다. “사실 지자체 교통과에서 스쿨존 등 어린이보호 업무는 가장 기피 대상입니다. 예산은 적고 민원은 많아 다들 도망가고 싶어하죠.”

그는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애들이니까요. 아이들 안전 문제잖아요. 우리 아이들 어릴 때도 가끔 생각해봐요. ‘맞구나, 이건 해야 할 일이구나’ 하죠.”

정 계장은 도로 환경을 안전하게 바꾸고 나서 꼭 다시 현장을 방문해본다. 정 계장은 지자체의 어린이 보행 안전 사업이 사고가 이미 발생한 곳을 정비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사고가 나고 난 뒤 더 이상 안 나게 만드는 것만큼 사고가 안 난 곳을 더 안 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곳에서도 언젠가는 사고가 날 수 있거든요.”

스쿨존 너머, 모든 길을 안전하게
어린이들이 직접 그린 '내가 바라는 통학로'의 모습

이제 막 첫발을 뗐다.

민식이법 제정과 같은 제도 정비를 우리 사회는 최근에야 시작했다. 이조차 아직 공격을 받고 있다. 제한된 구역 안에서만이라도 어린이가 죽거나 다칠 확률을 낮추려는 노력의 가치가 끊임없이 의심받고 비판받는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이제 막 어린이보호구역 지정과 관리에 돈과 관심을 쓰기 시작했다. 예산을 배정하고 정책을 집행할 때 가장 뒷순위였던 어린이 보호 업무가 이제서야 조금씩 앞으로 당겨지고 있다.

이것들은 최소한이다. 이제 어린이보호구역을 넘어선 모든 길에서 보행 어린이의 안전을 점검해야 한다. 개선해야 한다. 국가와 지자체, 그리고 어린이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어른들의 몫이다. 궁극적으로는 어린이들 앞에 연속성 있게 안전한 길을 이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초저출산 사회 대한민국에서 힘겹게 태어난 귀한 어린이들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비극들을 막는 하나의 방법이다. 어린이에게는 스쿨존 안과 밖, 모든 길에서 안전하게 살아남을 권리가 있다.

‘내가 만드는 어린이보호구역’

어린이가 걷기에 안전한 길이면 이 세상 모두에게 안전한 길입니다.

증강현실로 여러분 주변의 위험한 길들을 어린이보호구역으로 만들어주세요.

언젠가 진짜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모바일에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증강현실(AR) 캠페인 참여하기
이 기획에 참여한 사람들
<시사IN> 특별 취재팀
변진경 김동인 이명익 최한솔
디자인·구현
스튜디오 벨크로
데이터 분석 및 시각화
브이더블유엘(VWL)
영상 모션 그래픽
보이드스튜디오
일러스트
한성원
데이터 분석 보조
김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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